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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터/그냥 잡담

어지러움

 숨이 멎을만큼 어지럽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은 많지 않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첫 경험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시골 깡촌에서 서울 왕십리의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온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날짜는 8월 14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그 더운 날씨에 이삿짐을 옮긴 피곤함에 서울로 이사왔다는 흥분조차 잊고 단잠에 빠져있다가, 어머니께서 흔들어 깨우시는 바람에 깨어났다. 그 길로 바로 버스터미널로 간 다음 고속버스를 타고 남원으로 갔다. 나는 집안의 장남이지만 그때까지도 그 상황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친가 대문을 들어서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마당에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는 친지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댓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고, 흰 천에 덮여있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보았다. 천이라는게 무척 얇은 것이어서, 위에 덮어놓았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대상의 윤곽은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는가... 내 기억은 거기까지이다.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무렵에 사촌동생들과 함께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음료수를 한번에 마신 적이 없었다. 사이다, 환타 같은 병음료를 몇 궤짝 정도 사오신 것 같은데, 첫날 그것을 한 열댓병은 마셨다.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목이 말랐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목만 탔다.

 두번째 기억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이다. 당시 난 생과 사의 기로에 서있는 지경이었다.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고,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지옥과 같이 느껴졌고, 집 밖엔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고 숨쉬기조차 힘들정도로 아팠다. 거의 1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이지만 아직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가슴이 콱 막히고 몸서리쳐질만큼 슬퍼진다.

 세번째 기억은 군대가기 전 한 학기.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20대 초반이었다.  어리석게도 학교공부만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학점에 목을 매듯 생활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생활은 점점 뒤죽박죽, 성적은 장학금 하한에 수렴해갔다. 점점 목적의식을 잃어가고, 전공과목으로 들어가면서 수업은 제대로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그 상황에 한창 좋아하던 사람에게 퇴짜를 맞았으니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보는 친구들이 걱정할 정도로 피폐해져갔고, 결국 휴학계 제출 마지막 날 교수님께 찾아가 휴학을 하고 말았다. 이건 지금도 평가를 하지 못하겠다. 군대가서 잃은 27개월과, 군대에서 얻은 27개월 두가지 평가를 두자면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하는게 사실일 듯하다. 그때 휴학을 하지 않고 버틴다 했어도 내게 이득이 될 것이 없었고, 오히려 몸과 마음만 비쩍 말라 비틀어지게 했을테니까... 군대가서 고생좀 하고, 컴퓨터 실력좀 키우고, 내 바닥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고, 또 타인에게 보였으니 큰 가르침을 받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어지러움이 며칠 째.. 아니 몇 달 동안 또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다. 20대의 중반을 달려가는 지금도 성장통은 언제나 그대로구나.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늦었네. 눈은 침침하지만 속은 후련하다. 다음학기는 전공 커리큘럼에서 가장 악명높은 설계제조및실습... 지난학기엔 학교에서 잔 날과 집에서 잔 날이 비슷했는데... 이번학기엔 집에서 얼마나 자게 될까? 벌써부터 기분이 상큼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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