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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글터/마음의 소리

루 쉰, <아Q정전•광인일기>, 자서

… 그러다가 한 번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수많은 중국인들을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좀 느닷없달 만한 경험이었다. 화면 속에는 꽁꽁 묶인 사람이 가운데에 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멍청하게만 보였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러시아군을 위해 첩자 노릇을 한 자로서 일본군에게 집혀 공개 처형을 당하는 것이며 주위에 있는 군중은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쿄로 와버렸다. 그 영화 사건이 있고부터 나는 새로운 것을 느꼈다. 즉 의학이란 결코 중요한 것이 못 되며 국민이 우매하면 아무리 체격이 건장하고 우람해도 무의미한 공개 처형의 관중 노릇밖에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비한다면 병에 걸려 죽는 것쯤이야 그다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문예를 진흥시키는 길밖에는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문예진흥운동을 부르짖기로 결심했다. …

… <신생>의 출판일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몇몇 원고를 맡았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데다 자금을 대주겠다던 자들마저 달아나버려 결국에는 아무 힘도 없는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시작부터 이 모양이었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그 뒤 남아 있던 세 사람마저도 각자의 운명에 쫓겨 허둥대느라 한 곳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장래의 꿈을 이야기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미처 태어나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린 <신생>의 결말이다.
 그러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적막감을 느꼈던 것은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내가 왜 그런 적막감을 느끼는지 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마침내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어떤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는 전진할 수 있게 되고 또 반대에 봉착하면 분발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멀쩡한 사람에게 호소했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므로 이럴 때 사람은 끝없는 황야에 홀로 내팽개쳐진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는가? 나는 바로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적막감에 빠졌던 것이리라. …




- 루 쉰, <아Q정전•광인일기>, 자서